영화 ‘더 페이버릿(The Favourite)’은 2018년 개봉한 영국 역사극으로, 앤 여왕과 그녀의 두 여성 측근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력 투쟁과 감정의 소용돌이를 중심으로 한 실화 기반 영화입니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역사극과 달리, 등장인물의 심리와 정치적 긴장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현대적인 감수성과 페미니즘적 해석을 더했습니다. 오늘날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한 왕실 스캔들을 다룬 것이 아닌, 왕실생활의 이면과 당시의 영국문화, 그리고 역사와 허구가 조화를 이루는 배경분석을 통해 인간 본성과 권력의 본질을 직면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본 글에서는 영화의 왕실 묘사, 영국 문화적 요소, 그리고 시대 배경을 중심으로 ‘더 페이버릿’의 가치를 살펴보겠습니다.
영화 '더 페이버릿' 속 왕실생활의 민낯
영화 ‘더 페이버릿’은 전형적인 영국 왕실 영화와는 확연히 다른 방식으로 왕실을 재현합니다. 일반적인 궁정 드라마가 화려한 복식과 권위 있는 대사, 절제된 연기를 통해 고귀함을 강조한다면, 이 영화는 그 반대편에 있습니다. 병약하고 불안정한 앤 여왕은 정치적 리더십보다는 감정에 휘둘리는 존재로 그려지며, 그녀의 곁에서 그녀를 조종하거나 보살피려는 두 여성의 행동은 왕실이라는 공간을 하나의 생존 무대로 전환시킵니다.
앤 여왕은 통풍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끊임없는 육체적 고통 속에서 감정적 안정도 잃은 상태입니다. 궁전 안에서 그녀의 명령은 절대적이지만, 그 권위는 점차 사라져가고, 사라 처칠과 애비게일 힐이라는 두 인물은 그 권위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각자의 방식으로 권력을 장악해 나갑니다. 이들의 관계는 단순한 주종 관계를 넘어서, 감정적 의존과 질투, 배신이 반복되며 마치 현대 심리극을 방불케 하죠.
특히 이 영화는 궁정 내 삶을 지나치게 미화하지 않습니다. 화려한 식기와 복장은 있어도, 정치적 암투와 인간적 추함은 그대로 드러납니다. 성적 긴장과 질투, 조롱과 혐오가 난무하는 공간에서 '왕의 삶'이란 얼마나 외롭고 불안정한지 사실적으로 묘사되며, 이는 시청자들에게 기존 왕실 이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만듭니다. 왕실생활의 권위적 이미지가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이고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군주를 보여준 이 영화는 권력 뒤편의 고독함을 사실적으로 구현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영국문화의 다층적 표현
이 영화는 스토리 전개와 별개로, 시청자가 시대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시각적, 언어적, 문화적 장치가 매우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우선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말투는 고전 영어와 현대적 냉소가 결합되어 독특한 느낌을 줍니다. 이는 당대 귀족들의 형식적이고 거리감 있는 대화 방식을 반영하면서도, 현대 관객이 이해하기 쉬운 템포와 유머를 유지하여 이질감을 최소화하죠.
뿐만 아니라 영화에 사용된 미술적 디테일은 모두 18세기 영국 문화를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벽지의 무늬, 가구의 형태, 촛불만으로 밝혀지는 궁정의 분위기, 말로 이동하는 귀족의 생활상 등은 마치 박물관 전시를 보는 듯한 생생함을 제공합니다. 특히 조명 처리는 당시의 기술적 한계를 반영하면서도 예술적 분위기를 극대화하여, 그 시대가 갖고 있는 어둡고 은밀한 분위기를 시각적으로 전달합니다.
사냥, 무도회, 궁중 행사 등은 모두 귀족 계층의 사회 구조를 반영한 장면들입니다. 단순히 장식적인 요소가 아닌, 권력과 위계, 사회적 위치를 시각적으로 표현해주는 장치입니다. 예를 들어 애비게일이 하녀에서 귀족으로 점차 올라서며 참여하는 공간이 달라지는 것을 통해, 당시 사회의 계급 구조와 그 변화 가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또한 억제된 감정 표현과 격식 있는 의사소통은 영국 문화에서 중요시하는 절제의 미학을 반영합니다. 강한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행동이나 눈빛으로 내면의 갈등을 표현하려는 방식은 영국 연극 전통의 연장선에 있으며, 이를 통해 영화는 정제된 미감과 인간 내면의 불안정성을 함께 전달하는 데 성공합니다.
시대적 배경과 영화적 상상력의 조화
오늘 살펴본 영화는 철저하게 실제 역사에 기반하면서도, 창작적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품입니다. 1700년대 초반의 영국, 정확히는 1702년부터 1714년까지 재위한 앤 여왕의 시대는 영국 역사에서도 매우 민감한 시기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정당 간 대립, 계승 문제 등 정치적 혼란이 가득했습니다. 앤 여왕은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군주로, 후계자를 남기지 못해 왕위 계승 문제가 지속적으로 논란이 되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정치적 혼란 속에서, 여왕의 측근이었던 사라 처칠은 실권을 행사했으며, 실제로 그녀의 일기에는 애비게일 힐에 대한 질투와 분노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이 관계를 픽션화하여 더욱 극적인 구도로 재구성했습니다. 현실에서의 권력 다툼이 영화에서는 심리적 스릴러로 전환되었으며, 그 중심에는 세 여성의 불안정한 감정선이 존재합니다.
특히 영화는 단순한 정치극이 아닌 감정극으로 변모하면서, 당시에는 드러내기 어려웠던 여성 간의 사랑과 질투, 동성애적 긴장감을 묘사합니다. 이는 시대적으로 매우 도전적인 시도이며, 이를 통해 관객은 권력 구도의 이면에 감춰진 인간 본성과 사회 구조를 엿보게 됩니다.
영화적 상상력은 시각적 연출에서도 돋보입니다. 광각 렌즈를 활용한 촬영은 궁전의 왜곡된 권력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카메라의 느린 회전은 인물 간의 감정 흐름과 심리적 거리감을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배경음악도 바로크 음악을 재해석한 듯한 구성을 통해 고전과 현대의 충돌을 은유합니다.
이처럼 '더 페이버릿'은 사실과 허구, 전통과 실험, 역사와 창작의 경계를 오가며, 관객에게 단순한 '정보'가 아닌, 해석 가능한 ‘작품’으로서 기능합니다. 이 점에서 이 영화는 단순한 역사극을 넘어선 현대적 텍스트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영화 ‘더 페이버릿’은 단지 한 시대의 왕실 이야기를 다룬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권력, 문화와 감정의 경계를 탐구한 작품입니다. 화려한 배경과 의상 뒤에 숨은 인간적 갈등과 정서적 파열음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도 깊은 공감을 자아냅니다.
왕실이라는 폐쇄된 공간 속에서 여성들이 벌이는 복잡한 정치와 감정의 싸움은, 성별과 시대를 초월한 권력의 본질을 묻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영국 왕실생활에 대한 현실적인 접근, 영국문화의 정교한 구현, 역사와 상상력의 절묘한 조합은 이 작품을 단순한 사극이 아닌 시대와 문화를 해석하는 렌즈로 자리매김하게 만듭니다.
‘더 페이버릿’을 통해 역사극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동시에 우리가 알고 있던 ‘왕실’이라는 개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