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굿 걸(The Good Girl, 2002)’을 처음 봤을 때 제니퍼 애니스톤이 이런 얼굴을 할 수 있는 배우였나 하고 놀란 기억이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TV 속 레이첼로 익숙했기에 이 작품 속의 그녀는 어딘가 낯설고 낡은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화장기 없는 얼굴, 무표정한 눈빛, 그리고 무력감이 묻어나는 말투까지. 그런 변화는 단순한 이미지 변신을 넘어 그녀가 가진 배우로서의 깊이를 보여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영화는 거짓말이라는 흔한 키워드를 중심으로 삶 속의 회피와 피로, 내면의 허기를 조용히 조명합니다. 끝나고 나면 괜히 멍해지는 영화, 생각이 많아지는 영화라는 표현이 어울립니다.
거짓말, 삶을 견딘다는 것 그리고 무너지기까지
저스틴은 그런 인물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일상 속에 묻혀 사는 사람입니다. 그녀가 일하는 곳은 평범한 체인 화장품 매장이며 함께 사는 남편은 퇴근 후 늘 맥주를 마시는 소박한 남자입니다. 문제는 그 둘 사이에 오가는 말이 거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말이 없다는 건 단순히 대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서로에 대한 관심이나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쯤 되면 누구든 뭔가 숨구멍을 찾고 싶어질 것 같습니다. 저스틴에게 그 계기는 신입 직원 홀든이었습니다. 처음엔 그냥 대화가 통하는 상대였습니다. 누구보다 예민한 감정을 가진, 묘하게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감정이 깊어지면서 관계는 선을 넘고 저스틴은 그 순간부터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거짓의 세계로 빠져들게 됩니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건 거짓말을 엄청난 사건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소하게 시작된 일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그 결과로 저스틴은 자꾸만 자신을 지워가게 됩니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면서 자신을 보호한다고 믿었지만 오히려 더 잃어버렸습니다. 직장도 위태로워지고 남편과의 관계도 멀어지고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도 불분명해지는 상황에 놓입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저스틴은 자신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끝까지 정확히 말하지 않습니다. 관객은 그저 짐작만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게 현실과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늘 이유 없이 무너지고 설명 없이 후회하며 살아가니까요.
제니퍼 애니스톤, 낯선 얼굴로 남다른 연기를 보여주다
이 작품에서 제니퍼 애니스톤은 기존의 모습을 거의 모두 내려놓은 듯 보입니다. 메이크업도 거의 하지 않았고 말투는 무심하며 감정 표현도 절제돼 있습니다. 밝고 경쾌한 그녀가 아니라 지쳐 있고 굳어 있는 사람이 화면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 모습이 더 현실처럼 느껴집니다.
저스틴은 많이 말하지 않지만 그녀가 눈을 피하거나 담배를 피우는 장면에서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말 없이 서 있는 장면에서도 그 안에 있는 무게가 느껴지고 홀든과의 관계에서 감정이 요동치는 순간들은 무척 조용하면서도 뜨겁습니다. 대사가 없어도 그녀의 내면은 계속해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에서 그녀가 보여준 연기는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연기력이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더 감각적이고 감정적인 체험이었습니다. 프렌즈의 레이첼이 연기한 저스틴이 아니라 그저 그런 동네에서 지쳐 사는 누군가의 얼굴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작품으로 그녀는 틴 초이스 어워드에서 상을 받았고 평론가들 역시 이 배우를 다시 보게 됐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애니스톤은 이후 더 다양한 역할에 도전하게 되었고 케이크나 더 모닝 쇼 같은 작품들에서 또 다른 모습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출발점이 바로 이 영화였다는 점에서 굿 걸은 그녀의 커리어에 있어 전환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각본, 평가, 그리고 마음에 남는 것
이 작품은 영화계에서 꽤 진지하게 다뤄진 작품입니다.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고 로튼토마토에서도 좋은 평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외적인 평가는 오히려 부차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이 영화는 그런 지표보다 보고 난 뒤 남는 감정이 훨씬 강하게 기억됩니다.
마이크 화이트의 각본은 무척 조용합니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자극적인 장면도 많지 않습니다. 대신 상황과 대사에서 아주 평범하게 보이는 선택들이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감정이 터지게 만듭니다. 그 감정은 꼭 저스틴의 것이 아니어도 됩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누구의 감정이든 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무섭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도 사람은 이렇게까지 피폐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저스틴이 특별히 악하거나 비도덕적인 인물이라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오히려 주변의 무관심과 고립 속에서 누군가가 조금만 손을 잡아줬다면 달라질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단지 불륜이나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내 감정에 솔직한가, 내가 타인의 기대에만 맞춰 살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런 질문들을 조용히 던집니다. 관객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저스틴의 얼굴을 떠올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어쩌면 그녀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굿 걸'이라는 제목은 아이러니하게 다가옵니다. 저스틴은 스스로를 착한 여자라고 믿었지만 결국은 그 믿음조차 거짓이었음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착하다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요. 누군가를 실망시키지 않는 것일까요. 아니면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영화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질문을 계속 안고 살아가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묘하게 잔상이 남습니다. 끝나도 끝난 것 같지 않고 오히려 시작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거짓말로 시작된 이야기가 오히려 우리에게 정직함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굿 걸은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